외규장각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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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일생과 의궤

조선왕조의 의궤에는 국왕을 비롯한 왕실 구성원의 출생, 관례(冠禮)와 책례(冊禮), 혼례(婚禮), 장례(葬禮)와 같은 일생의 통과의례, 그리고 국왕의 재위 시절 시행한 주요 의례와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숙종 대에는 약 65종의 의궤가 제작되었는데, 이 시기 의궤는 형식적 체재가 한층 정비되었으며 당당한 품격과 고전적인 깊이가 있다.
숙종의 즉위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외아들로 1661년(현종 2) 8월 15일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다. 숙종은 1667년(현종 8) 1월 22일 관례를 행한 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 14세에 왕위에 올랐다. 숙종의 등극은 첫째 왕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이상적인 왕위 계승이었기에 숙종은 처음부터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측 이미지 - 숙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
관련 의궤
세 번의 혼례, 세 명의 왕비. 숙종은 왕비를 세 번에 걸쳐 맞아 들였으나 불행하게도 왕비에게서는 모두 후사(後嗣)를 얻지 못했다. 첫 번째 왕비는 숙종이 왕세자 때 세자빈으로 맞이한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다. 인경왕후는 광산 김씨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1671년(현종 12)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숙종 즉위 후 왕비가 되었으나, 1680년(숙종 6) 20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소생(所生)으로 두 딸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두 번째 왕비는 인현왕후(1667~1701)는 민유중(閔維重)의 딸로, 1681년(숙종 7) 5월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국왕의 혼례식이니만큼 이전의 왕세자 시절의 가례에 비해 규모와 위엄이 더욱 갖추어졌다. 인현왕후는 붕당 간 대결이 치열한 정국과 맞물려 1689년 폐위되었다가 1694년 복위되었다. 인현왕후는 1701년(숙종 17) 35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소생은 없다. 세 번째로 맞이한 인원왕후 김씨(1687~1757)는 김주신(金柱臣)의 딸로 1702년(숙종 28) 왕비로 숙종 승하 후 왕대비가 되었다.  ,
이런 상황에서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후의 경종)과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후의 영조)의 존재는 정국을 복잡하게 만드는 배경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관련 의궤.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1671(현종 12)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1681(숙종 7)
숙종인원왕후가례도감의궤 1702(숙종 28)
세 번의 환국, 왕권의 강화. 숙종 재위 기간은 붕당(朋黨) 정치가 절정에 이른 때로서 붕당 간의 대립이 극성하여 정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들은 왕위 계승 및 학문적 견해에 대한 첨예한 이견으로 인하여 속종 전반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고 후반기에는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형국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집권당을 일거에 바꾸는 이른바 ‘환국換局’으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왕의 권위와 힘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숙종 대에는 세 차례의 환국이 있었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의 승리로 정국을 주도하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허견(許堅)과 복선군(福善君)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대거 실각하고 이를 고변한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를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한다. 숙종은 이 사건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녹훈하고 그 과정을 기록한 『보사녹훈도감의궤(保社錄勳都監儀軌)』를 만들었다.
보사녹훈도감의궤
1689년(숙종 15)에는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있었는데, 숙종이 후궁 장씨의 아들(후의 경종)을 원자(元子)로 삼고자 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결국 원자정호(元子定號)를 찬성한 남인이 승리하고 반대한 서인은 실각하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인현왕후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숙종은 이듬해인 1890년(숙종 16) 원자를 세자에 책봉하였다.
경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
1694년에는 폐위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 문제를 계기로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왕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숙종은 기사환국으로 녹훈이 삭제되었던 보사공신의 녹훈을 회복시키고 그 과정을 『보사복훈도감의궤(保社復勳都監儀軌)』로 기록하였다.
보사복훈도감의궤
관련 의궤. 보사녹훈도감의궤 1680년(숙종 6)
희빈중궁전책례도감의궤 1689(숙종 15)
경종왕세자책례도감의궤 1690(숙종 16)
보사복훈도감의궤 1694(숙종 20)
선왕에 대한 추모와 기억. 숙종은 재위 기간 동안 종묘의 제도와 의절(儀節)을 정리하고 왕의 초상화와 이를 모신 건물인 진전(眞殿)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왕의 영정(影幀)은 어진(御眞), 어용(御容)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종묘의 신주와 같이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진전을 별도로 설치하여 모셨는데, 양란을 거치며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 
숙종 대에는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중건한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하고, 세조를 비롯한 역대 왕의 어진도 모사하여 다시 제작하였다. 남별전은 영희전(永禧殿)으로 개칭되었다. 숙종은 자신의 어용을 제작하여 강화부 장녕전(長寧殿)에 봉안하였는데, 이 때부터 현 왕의 어용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이후 영․정조대에 이르러 10년마다 어용을 제작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 숙종은 이러한 어진의 제작과 봉안을 통해 국조(國祖)와 선왕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
숙종이 태조, 정종, 태종 등 조선 초기 왕들의 시호를 더한 것 역시 조선의 개창(開倉)과 수성(守成)이 왕실에서 비롯됨을 강조하여 국왕과 왕실의 위엄을 높이는 일환이었다. 또한 숙종은 단종과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복위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능을 새롭게 단장하였으며,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하고 시호를 내려 왕실의 충역(忠逆) 평가를 왕권 강화 측면에서 재정립하였다.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 단종장릉봉릉도감의궤 사수도
관련 의궤. 남별전중건청의궤 1677(숙종 3)
정종정안왕후시호도감의궤 1681(숙종 7)
태조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 1683(숙종 9)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 1688(숙종 14)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 1713(숙종 39)
정순왕후사릉봉릉도감의궤 1698.10(숙종 24)
단종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 1698.1(숙종 24)
단종정순왕후장릉봉릉도감의궤 1698.1(숙종 24)
민회빈봉묘도감의궤 상 하 1718.8(숙종 44)
숙종의 승하. 숙종은 재위 46년 되던 1720년  6월 8일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숙종’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숙종빈전도감의궤
외형적으로 보면 숙종 대는 붕당 간 대결이 가장 치열한 시기였으나 정책 대결의 긴장감 속에 내치(內治)가 안정된 측면도 있다. 특히 숙종 재위 45년 10개월간의 치세 동안, 임진왜란 등 이전의 전란과 재해의 복구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다음 시기로의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안정된 기반을 마련한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숙종 국장도감의궤
관련 의궤. 숙종빈전도감의궤 1720(경종 즉위)
숙종혼전도감의궤 1720(경종 즉위)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 1720(경종 즉위)
숙종국장도감의궤 1720(경종 즉위)